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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조선의 마지막 선비들
2020-01-05 09:41:42
사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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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나 권력을 가진 지배계급은 칼과 총으로 백성을 지배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붓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계급이 있었는데 이들을 선비라고 불렀다. 선비가 무력을 가지지 않고도 오랜 세월 지배력을 잃지 않았던 것은 탁월한 행정력과 도덕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하의 근심을 누구보다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맨 나중에 즐긴다"는 선비정신은 동양식 노블레스 오블리주이다. 그러나 이런 세상은 조선왕조의 쇠락과 외세의 위협 앞에 개국을 허락한 이후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말았다.

 

면암 최익현 (1833-1906)

개화를 용서할 수 없었던 선비 최익현은 1876년 조정이 일본과 수교하는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 앞에 꿇어 엎드려 큰 도끼를 등에 걸머지고 "지부복궐척화의소(持斧伏闕斥和議疏)"라는 위정척사의 상소문을 올렸다. 내용의 일부를 살펴보면 "저들이 비록 왜인의 이름을 청탁했으나 실은 양적입니다. 강화하는 일을 이루면 사학의 서책과 천주의 초상이 교역물에 뒤섞여 들어오고 얼마 후면 전도사와 신자가 온 나라에 가득해질 것입니다.......조만간 집집마다 사학을 할 것이고 그러면 아들이 아비를 아비로 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게 되어 예법은 시궁창에 빠지고 인류는 금수가 되어버릴 것입니다"했다. 이런 주장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개혁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갈 틈이 없었다. 후일에 최익현은 "왜적을 토벌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74세의 나이에 의병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일본군에 압송되어 재판을 받은 후 대마도에 구금되어 생을 마쳤다. 그의 장례식 운구행렬에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구할 수는 없었다.

 

고균 김옥균 (1851-1894)

최익현이 수구파였다면 김옥균은 개화파 중에서도 급진파에 속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왕을 볼모로 삼고 국정을 좌우한다"는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김옥균이 태어났던 시대에 일본에서는 미국 페리 제독이 함포외교로 도쿠가와 막부를 위협하여 250년 이상 계속된 쇄국이 무너트렸고, 중국에서는 아편전쟁의 결과 난징조약이 체결되어 강제로 서구열강에 문호가 개방되었다. 이처럼 이웃나라들이 격류에 휘말려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조선은 여전히 세도정치의 그늘아래 부패를 이어가고 있었고 백성들의 삶은 참혹하였다. 김옥균은 이런 현실에 분노하며 안타까워했고 조선의 현실이 생지옥인 마당에 최익현처럼 상투와 도포를 보전하기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여겼다. 최익현이 유교의 주자학에 매여 있을 때 김옥균은 유교의 가르침 중에 경장(更張)을 중시했다. 경장의 목표는 부강한 나라, 백성들이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데 있었다. 그러나 1884년 일본을 등에 업고 일으킨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실패하고 말았다. 후일에 실패의 이유로 "임금을 위협해 순리를 잃었다. 외세에 지나치게 의지했다. 인심에 불복했다. 청나라 군대를 대비하지 못했다. 지지 세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옥균이 거사를 도모한 것은 "사세가 불리하더라도 대의가 있다면 성패를 하늘에 맡기고 목숨을 건다"는 지사적인 결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무인이나 승려, 권문세족의 지배권을 부정하고 유교적인 선비가 주역이 되었기 때문에 "선비의 기상이야말로 국가의 원기이다"라는 말이 상식처럼 굳어진 사회였다. 이렇게 500년을 지탱해오던 역사가 종지부를 찍은 것은 1910년이었다. 유교와 주자학에 물들어 있던 선비들은 자신들의 세계가 무너지자 어떤 사람은 세상이 망했다고 은둔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은 시대에 부응한다고 개화의 선구자가 되었고, 일제6년을 통해 자유쥬의자,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로 분화해 나갔다. 시대정신이 무너지자 "천하를 위해 근심해야 할 선비들이 무엇을 근심해야할지" 천하가 무엇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아 혼란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시대에 존왕양이를 내세워 국왕의 권력을 강화시켜주려고 하다가, 서양을 본받아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이 아닐까? 구당 유길준, 겸곡 박은식, 석주 이상룡, 국초 이인직, 위암 장지연, 단원 신채호, 벽옹 김창숙, 조소앙 등이 그 뒤를 잇고 있다.

 

<뉴스앤뉴타운 1월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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